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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정공>창신교위공휘창문묘표(彰信校尉公諱昌門墓表)
彰信校尉公諱昌門墓表 府君諱昌門字大甫官彰信校尉我淳昌之趙肇于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自後簪組奕奕爲東邦著姓至諱元吉大匡輔國光祿大夫門下侍中玉川府院君諡忠獻生諱瑜文科中顯大夫 典農寺副正値高麗鼎革自靖守義我 太宗朝徵以資憲大夫漢城判尹不就生諱崇文武科兵馬節度使 光廟丙子之禍與六臣同殉節後 贈資憲大夫兵曹判書諡節愍生諱哲山同父殉節丙子後 贈朝奉大夫童蒙敎官生諱瓊幼坐謫幸州後宥還而終以上爲府君父祖以上所自出之直系也府君承家於禍患震剝之餘一生畏縮謹愼隱遯以終而常痛恨于增若祖非命之死每飲酒至醉輒注注泣下或至失聲而哭家人及親友相戒勿勸酒以終一生常戒子弟曰爲吾祖之子孫者但當樵山漁水力農劬經不失士夫家規範而己至若取科宦出世路則以待他日可也此可見府君善繼先人杜門之志也與群弟友愛甚篤長枕大被晨夕不相離以爲家常鄉黨皆嘖嘖稱之曰趙氏又添一相好亭云云者盖先是有府君之再從祖中樞府事諱智山兄弟四公篤友愛作一亭同處扁以相好亭故也墓在順天住巖面粉箱洞良原配恭人金海許氏育一男諱愷生三男二女長宗元次宗義次宗禮女長適杞溪兪焰適宜寧南顯以下省略上記府君事行不肖輩所甞聞於家庭傳來之言而顧其歿後至于今殆五百年之久而墓無顯刻之文以著其孝友忠信之懿德而至於譜牒記載疎畧己甚者抑何耶或有懲創於當時禍患之餘故爲沈湮也耶嗚呼可勝歎哉不肖懼夫年代愈遠傳説浸衰而無文獻可徵故思欲竪碣以表于墓謹據譜牒所載及家中傳説之一二記之如右或不爲僭越之科也歟 歲疆圍作噩清明節 十五世孫 琫勳 謹識 창신교위공휘창문묘표(彰信校尉公諱昌門墓表) 부군의 휘는 창문(昌門)이요, 자는 대보(大甫)며, 벼슬은 창신교위이다. 순창조씨인 공은 단종때 충신 절민공 휘 숭문(崇文)의 증손이요 두문공(杜門公) 경(瓊)의 아들이시다. 부군이 참화(慘禍)로 박멸된 뒤를 이어 그 진상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일생을 두려워하고 움추려 근신하며 숨어서 세상을 마쳤지만 항상 증조와 조고가 비명에 돌아가신 것을 통한하여 매양 술 마시고 취하면 문득 눈물을 주르르 흘리기도 하고 혹 실성한 듯 통곡하니 집안 사람 및 친우들이 서로 술을 권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항상 제자를 훈계하되 우리 선조의 자손된 자는 다만 산에서 나무나 하고 물에서 고기를 잡으며 부지런히 농사짓고 글 읽기를 힘써 선비 집안 체통을 지킬 따름이요. 과거를 보아 출세할 일은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가하니라 하시었으니 이로써 선인의 두문한 뜻을 계승하였다 하겠다. 여러 아우와 더불어 우애가 독실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밤과 새벽에 서로 떠나지 않음으로써 가법을 삼으니 향당(鄉黨)이 모두 칭송하였으며 조씨가 또 상호 한 정자를 더 하였다 말한 것은 선세에 부군의 재종조 중추부사(中樞府事) 휘 지산(智山) 四형제가 독실한 우애로 정자를 지어 함께 거처하며 상호정(相好亭)이라 현판 한 때문이었다. 묘소는 순천 주암면 분상동 간원(粉箱洞艮原)에 있고 배는 공인(恭人) 김해허씨(金海許氏)로 생육한 一남 개(愷)가 三남二녀를 두었는데, 남원 종원(宗元) 종의(宗義) 종례(宗禮)요, 딸은 기계유염(杞溪兪焰)과 의령남현(宜寧南顯)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이하는 생략한다. 위에 기록한 부군의 사행은 불초의 무리가 일찍이 가정에서 전해온 말을 들은 바이다. 돌아보건대 별세하신 지 무릇 四, 五백년 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묘소에 현양(顯揚)한 글을 새겨 효우충신(孝友忠信)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낸 것이 없고 보첩의 기재 또한 이와 같이 소략(疎略)한 것은 대저 어쩐 일인가. 혹 당시의 화환의 남은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숨긴 것인가. 아! 통한하도다. 연대가 멀어 전설이 희미하고 증빙한 문헌이 없음을 두려워하여 비갈을 세워 묘도에 표하고자 생각하고 삼가 보첩에 기재된 바와 집안에 전설의 하나 둘 을 들어 위와 같이 기록하니 혹 외람된 행사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十五세손(世孫) 봉훈(璋勳)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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